1/30 대운동회 녹흑 생일 기념 배포본

약간 잔인한 묘사와 취향 타는 설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편지

To.쿠로코 테츠야.

 

 

쿠로코 테츠야와 미도리마 신타로가 헤어지게 된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쿠로코는 미도리마의 과한 사랑에 답해주기 버거웠고, 미도리마는 쿠로코의 의견을 지나치게 존중해주었다. 그뿐이었다. 미도리마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을 덜 주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쿠로코가 참고 참아오다가 그 사랑을 견딜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좀 더 표현을 하지 않겠다는 말 대신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그에게는 닿지 않는 사랑을 넘치게 주기로 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헤어진 다음날, 미도리마는 일기장과 편지지세트를 사왔다. 일을 마치고 와서 그와의 추억이 가득 깃들어있는 집안, 사랑하는 사람이 앉아서 미도리마의 책에 몰두하곤 하던 그 나무책상 위에서 그와 있었던 추억을 검은 잉크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시작은 간단했다. 하루에 그와 있었던 일 하나, 그리고 한 줄로 쿠로코에게 가벼운 사랑고백을 하는 것. 그는 독후감이나 다른 글짓기에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나 정작 편지를 쓰기 위해 펜을 들면 손이 떨려 그것밖에 적지 못하는 것이다. 일기를 쓰는 데에도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일기장에는 한 장이 모자를 정도로 빽빽이 적었는데. 아무래도 전달자의 차이인 게 아닐까. 미도리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 편지지를 접었다.

겨우 써서 봉투 안에 담은 편지는 받게 될 이가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않게 될 때 부치겠다고 마음먹으며, 마침 집에 온 작은 택배상자의 내용물을 비우고 풀로 꼼꼼하게 봉해둔 편지봉투를 넣었다. 물론 우표를 붙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렇게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작은 박스에 다 들어가지 않아 큰 박스로 바꿀 무렵, 미도리마는 쿠로코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한 달이 넘게 남았지만, 진인사를 다하는 그의 성격답게 지금부터 선물을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생일까지 자신도, 그에게도 만족하는 선물이 되지 못할 거니까.

미도리마는 그 날,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 전부터 그가 받을 수 있도록 쓰던 편지는 전부 자신의 방 한쪽에 그대로 두고, 이제야 조금 제대로 써지기 시작한 편지만을, 매일매일 보내는 것이다.

피곤하기만 했던 퇴근길이 저도 모르는 사이 즐거움으로 바뀌었고, 결심한 오늘은 더없이 행복했다.

 

D-32.

미도리마는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다. 처음으로 우체통에 넣은 편지봉투 안에는 빽빽이 적어진 두 장의 편지지가 있다. 미도리마는 처음과는 다르게 점점 더 많이 포현할 수 있음에 기뻐 벌써 해가 져 가로등빛이 쏟아지는 길 위에서 한참동안을 우체통 옆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다음날 감기에 걸려 된통 고생했지만 편지를 부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당연한 걸까, 아니면 이상한 걸까. 쿠로코에게서는 전혀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답장이 오지 않는 게 당연하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나보다. 평소에는 하루라도 늦어질까 칼같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던 그의 손이 고민하는 듯 잠깐 멈추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 뒤로 바로 넣긴 했지만, 한 번 생긴 부정적인 감정이 모르는 사이에 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미도리마는 쿠로코를 사랑했다. 애당초 그럴 정도로 쿠로코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헤어질 일조차 없지 않을까. 열일곱 번째의 편지를 쓰던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했다. 이런 자신이 비정상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다 쓴 편지의 마지막에 발신인을 적었다.

 

언제나 사랑하는 테츠야를 생각 하며.

미도리마 신타로가.

 

D-10

평소처럼 미도리마가 편지를 보내려고 나오는데, 편지 한 통이 우체통에 있었다. 평소에 관공서나 다른 곳에서 오는 편지 무늬가 아닌 색이 들어있는 편지봉투였다. 미도리마는 그것이 대번에 자신의 것임을 알았다.

설마 쿠로코의 답장일까. 숨길 수 없는 기대를 품으며 앞에 있는 편지를 넘긴 미도리마가 접한 것은 잔뜩 구겨져있는, 반송 도장이 찍혀있는 자신의 편지였다.

구겨진 모양을 잠시 굳었나 싶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편지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것이 없는 발걸음으로 10일 뒤 쿠로코 생일에 보낼 선물을 고민하며 우체통으로 향했다.

오늘은 더없이 기쁜 날이었다. 그 구긴 자국이 누군가의 손으로, 거의 확실하게 쿠로코가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보고 버렸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쿠로코가 자신의 편지를 싫어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반응을 보이는 것은 편지를 보내면서 처음이 아닐까. 미도리마는 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쿠로코가 보고 싶었다. 미도리마는 느릿하게 걸어가며 예전의 쿠로코를 생각했다. 곧 쿠로코의 생일이어서인지 생일 축하를 해주었던 몇 년 밤의 그가 떠올랐다. 거짓말하는 것이 서툴러서 몰래 준비한다고 했지만 이미 거의 들통나있는 작은 깜짝 이벤트에도 기쁨을 숨기지 않고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곤 했던. 더 없이 사랑스러운 그가.

 

!!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갑작스럽게 생각난 한 가지 방법이 미도리마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미도리마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어둡고 시린 겨울밤의 하늘을 보며 그는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들고 있는 편지를 부치기 위해 달려갔다.

 

두 번 다시 줄 수 없는, 쿠로코에게 줄 생일선물이 생각났다.

 

 

D-day

쿠로코는 눈을 떴다. 평소의 아침과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131. 그의 생일이었다는 것이다. 휴대폰에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메일이 몇 통 와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쿠로코의 얼굴에는 짙게 그늘이 깔려있었다.

헤어진 남자에게 편지를 받기 시작한 지 한 달째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읽지도 않고 버리다가 한 1주일도 더 전쯤, 매일 한 통씩 오는 편지를 안 보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 열어봤던 적이 있었다. 설마 이상한 게 있을까, 라는 안일한 생각이 조금 들어서 경계하지 않았는데, 편지지 내용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편지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편지지에는 쿠로코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빼곡하게 적어져있었다.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아 다음날 온 편지를 구겨 반송시켜버린 이후로는 온 편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편지 내용이 아직도 머리에 남아 악몽으로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다가 오늘 드디어 선잠이라도 잔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생일이니까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생일다운 하루를 보내자고 다짐하기 무섭게 벨소리가 울렸다.

택배 왔습니다.”

누가 시기에 맞추어 선물이라도 보낸 걸까. 택배를 받은 쿠로코는 발신인을 보고 놀라 박스를 떨어뜨릴 뻔 했다. 기사는 잠시 놀라긴 했지만 별 말 없이 수취인 도장을 달라는 업무적인 말만 하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꼼꼼하게 싸여있는 박스를 한참 보았다. 그리 무겁지도 않았고 딱히 소리도 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박스를 연 쿠로코는 완충제가 가득한 박스를 보았다.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완충제를 조금 치우고 내용물을 확인한 쿠로코는 터지려는 비명을 간신히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완충제덕분에 깨지지 않은 유리병 안에는, 녹색 안구 한 쌍이 들어있었다.

포르말린 액체에 담겨 반쯤 떠있는 눈동자가 쿠로코를 향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From.미도리마 신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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